지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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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2년(임진보) 파보에 의하면 맹산부군께서 처음 대구에 시거하셔서 처음에는 빼골(수동)에 사시다가, 그후 갓골로 이거 태동부군도 갓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태동부군이 서울에서 56세에 졸하신 후 갓골은 향암공이 차지하게 되었고(향암공이 태동부군의 병환을 궁환하였음) 다천부군께서 어린 4남매를 데리고 지묘로 오셨습니다. 태동부군의 호가 유래한 곳은 삼태봉입니다.

 

 그 후 우리파는 지묘파가 된 것이고 웃골의 대암공도 다천부군 병환 궁환하시다가 다천공이 38세에 졸하신 후 지묘에서 웃골로 살림을 나셨습니다. 태동부군 장사전에 다천부군께서 졸하셨습니다.

 

 지묘란 역사가 깊은 지명입니다. 신라시대에 지묘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도 왕건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만한 여러 지명들이 있습니다. 고려의 왕건이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되었다가 견훤의 군사가 파군하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는 말이 있으며, 파군재를 넘어 파계사 방면으로 가면 경주최씨 지묘동으로 마을 형세는 남으로 왕산이 둘러서 있고 한들과 탑들이라 불리는 옥토가 조그만 벌판을 이뤄 이곳 최씨부락의 곡창 구실을 했으나 지금 탑들은 아파트 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왕산의 내력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이곳 지묘동 앞 산 이름이 왕산이 되었으며 왕산에 왕건이 앉았던 바위를 일인석이라고 불러오고 있습니다.

 

 파군재는 당시 왕건의 부하 장절공 신숭겸 장군이 왕건의 갑옷을 바꿔 입고 순절하자 견훤군사가 속아 돌아가 파군재로 불리었고, 파군 후 숨을 돌린 왕건이 지금의 강동에 피해와 앉으니 이곳을 독좌암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해안은 왕건이 그곳에서 안색이 풀렸다하여 지명으로 되었으며 동촌 비행장 북부일대를 해안이라 부르고 초등학교명도 해안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이런 야사가 얽힌 지묘, 강동, 대명동, 수동(빼골), 갓골(지동) 및 웃골 일대가 모두 경주최씨의 취락지이며, 이중 모든 최씨 각파가 모여사는 곳이 지묘동입니다. 태동부군의 아들 3형제가 각각 지묘, 웃골(칠계)강동, 갓골(빼골)로 갈려져서 취락을 형성하였습니다.

 

 지묘동의 입향조이신 태동공의 장자 다천부군께서 4백여년전 지금의 동구 지묘동에 입향하셨을 때만 해도 이곳 지묘동에는 "최씨집안이 타 성씨 없는 마을을 만들어 마을 앞 들을 최씨 한집안이 경작한다"하여 한들이라 칭하였습니다. 또한 입향 당시 신라때에 지묘사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을 "지묘"라 불렀다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졌으나 땅을 깊이 파면 신라의 기왓장이 나오곤 합니다.

 

 마을 앞에는 팔공산에서 명밭골을 지나 차를 끓여 마실 수 있을 만큼 맑은 다천이 흐르며, 서쪽에는 왕건의 군사가 견훤의 군사를 돌아가게한 후 나팔을 불었다는 나팔고개가 있으며, 남서쪽에는 부엉이 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임란 후 태동부군의 향화를 받드는 평천서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홰철되었고, 그 후 태동부군의 불천위별묘를 건축하여 지금도 행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옛 효제당은 지금은 현판과 기문만 남아있고 밭으로 변해있으며 마을 위 다천정은 지난 화재 후 4번째 재건축하였습니다.

 

 지묘 앞 동화천에서 내려오는 시내가 평천입니다. 바로 그 시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장절공 신장군의 단소가 동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