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광정공파 / 다천공(다천부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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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으며, 32년(신라 유리왕 9) 최씨로 성을 하사 받은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鄭)씨의 조상으로 되어있으며 진주 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하고 있다.

     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며 소벌도리의 24세손인 최치원(崔致遠)이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개성, 삭녕, 동주(철원), 전주(최군옥) 등의 본관으로 나위어지고 최치원을 1세조로 하는 경주 최씨에서 최치원의 첫째 아들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 청주, 충주, 영흥,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등으로 분관이 되었고 지손에서 해주, 진주, 탐진, 전주(최균) 등으로 분관했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 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으나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 고려시대에 세력을 떨쳤다. 그밖에 김씨에서 최씨로 성을 하사받은 수성 최씨와 중국의 귀화 성씨인 충주최씨가 있다. 최씨는 문헌에 326본으로 나와 있으나 현재는 125개의 본만 전한다.

     857년 신라의 사량부에서 출생했던 고운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0년안에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나라에 건너가 선주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치적을 쌓아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승사(承賜)받았다.
 
     특히 고운은 관계에 나가서도 학문에 힘을 기울여 [중산복궤집]과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녀분기담(雙女墳奇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명저를 저술했으며, 884년 28세가 되던 해 10월 당나라 희종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가 되었다.  

     894년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소풍농월과 휘호농필(揮毫弄筆)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961년(고려 광종2)에 95세로 선화(仙化)했다고 한다.
     특히 고운(孤雲)은 당시 동이(東夷)라고 멸시해 오던 동방인(신라인)으로서 당나라 명사들과 학문으로 겨루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일찍이 신라의 국정을 개탄했던 고운은 [계림은 누른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말하여, 고려가 신흥국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를 왕건에게 보냈으며, 그의 자손들과 문하생들이 고려 건국초에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일 현종은 [최치원이 고려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史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증시(贈諡)하였으며, 조선때 와서는 인조, 명종, 선조 임금이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다.
 
     한편 재능이 특출하여 태조 왕건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승로(承老:고운의 손자)는 나이 겨우 12살에 태조 앞에 나가 [논어(論語)]를 암송하였는데 60고개를 막 넘어선 태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어 승로에게 염분(鹽分)을 하사했으며,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의 학사로 보내어 학문하는 분위기 속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후 승로의 나이 17세때 고려 태조가 죽고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을 비롯하여 정종, 광종, 경종을 거쳐 6대 성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고려 창업 이후의 여러 가지 모순과 신라로부터 이어져온 적폐, 또는 문물제도의 미비에서 오는 여러가지 혼란들에 대하여 세밀히 분석하여 군제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의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개국공신 후손의 등용 등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간추린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함으로써 고려왕조의 기초를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 충렬공파(忠烈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문밀공파(文密公派), 문정공파(文正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6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왔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관가정(觀稼亭) 청(淸)이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 첨의중찬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때 사복시정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 풍양의 송산에 들어가 은거했으며, 이태조가 좌찬성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를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로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년 9월 28일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고려의 관직을 쓰라]고 유언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조선 소함인 좌찬성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 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문하시중 제안(齊顔)의 증손이며 고려 말의 문신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계림군 탁(倬)은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충렬공 광위(光位)는 고려 명종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초명(初名)인 광훈(光勳)에서 광위(光位)로 사명받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문창후의 9세손으로 고려 충숙왕때 서해도 안렴사를 역임했던 화숙공(和淑公) 현우(玄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화숙공 현우의 5세손 형손(亨孫)은 장흥부사를 지내고 적개공신에 올라,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한홍(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에 올랐다.

     화숙공 현우의 7세손 숙생(淑生)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사간과 대사헌을 거쳐 우찬성에 이르렀고,  인조때의 명장 진립(震立)은 경주최씨의 [쌍의(雙義)]로 가문에 절맥을 이었다. 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繼宗)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늙었다는 이유로 근왕(勤王)하는 장수를 바꾸려하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종하는 후미부대를 지휘했다.
 
     한쪽 눈에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일생을 기인(奇人)으로 살았던 호생관 북(北)은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 불리웠으며, 팔도를 주유하다가 금강산 구룡연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외 정조때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칠계선생(漆溪先生)]으로 일컬어졌던 흥원(興源)과 시집(詩集)을 남겼던 소(昭)를 비롯한 그의 손자 성효(性孝)가 뛰어났으며, 동학교조 수운(水雲) 제우(濟愚)는 경주 귀미산 용담에서 득도하여 동학을 창설했고, 토대로 하여 이 세상은 공맹(孔孟)의 덕(德)으로는 부족언(不足言)이라 하고 [인내천 사상(人乃天思想)]을 제병장생(濟病長生)을주장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표현했으며, 종수(宗秀)의 아들 시형(時亨)은동학의 제 2대 교주로서 이름났었다.

     한말에 지탄의 대상이었던 대원군의 정책을 탄핵하고 일생을 대절로 살다간 면암 익현(益鉉)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운동을 지도했고, 항일구국 항쟁의 최선봉에 나섰던 한말 최대의 거유(巨儒)였다.  면암은 고종때 장령을 거쳐 호조 및 공조판서와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국가 패망의 때를 당하여 여러 동지와 더불어 죽기를 결심하고 의기를 높이 들어서 싸우고자 한다]는 거의소(擧義疏)를 채택했다.
     [백발이 휘날리어 밭이랑에 드날림은/초야의 충심을 바치려 함이로다/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할 일/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오] 당시에 면암이 지은 시로서 구절마다 애국 충성의 염이 가득하여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밖의 인물로는 일본의 과중한 과세에 항거했던 봉환(鳳煥)과 세종대왕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우리나라 한글 발전에 공헌했던 외솔 현배(鉉培), 독립운동가인 창식(昌植) 등이 학문과 충절의 전통가문인 경주최씨를 더욱 빛냈다.

 

 

경주최씨 광정공 다천공(다천부군)파, 촌수, 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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