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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승만이 心山을 때려잡으려고 했던 일
최훈영  2006-11-11 17:22:48, 조회 : 1,925, 추천 : 310

리승만이 心山을 때려잡으려고 했던 일




심산(心山 金昌淑1879~1962)선생은 하루빈(河淚濱 安重根1879~1910)선생과 동갑나이다. 닮은 데가 많다. 국제인물이라는 것이 같고, 세계인물이라는 것이 같다. 하루빈과 심산 두 사람은 노벨평화상을 받고도 남을 사람이다.

심산은 1919년에 나라를 찾으려고 압록강을 넘어갔다. 상해에 가서 광복동지들을 만났다. 단재(丹齋 申采浩 1880~1936) 하고 뜻이 맞았다. 광복군을 양성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의렬단(義烈團) 지도자로 일했다. 자팬 총독부 경찰은 심산을 체포하려고 현상금을 걸었다. 상해에서 체포되어 14년 징역을 받았다. 광복군 양성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던 왜로에 항거하니, 전기고문으로 두 다리를 끊게 되었다.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다가 다리 두 개를 끊기고 말았던 것이다. 대전형무소에서 14년 복역만기로 1945년 8월 16일에 풀려 나왔다. 광복후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여 총장이 되었다.

리승만이 미워했던 사람 가운데 단재가 으뜸이고, 그 다음이 심산이었다. 단재는 상해에서 리승만을 쫓아내는 탄핵안을 발의했다. 심산은 단재와 뜻이 맞아서 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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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보선시대 <第二共和國樹立 記念刊 民主韓國 四月革命靑史>라는 책이 1961년 3월에 발행되었다. 第五章이 <발악하는 독재정권>으로 되었다. 쪽448에 <儒道會 분규>가 나온다. 그 글을 여기에 옮겨 둔다.

<해방후 유도회는 독립운동의 대선배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을 회장으로 하여 꾸준히 그의 힘을 지속해 왔다. 사회에서도 김창숙의 강직한 성격을 알고 있으므로 정계의 풍파가 거셀지라도 儒道會만은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최후까지 자유당에 가담 안한 것은 유도회 뿐이었다. 이러한 유도회에도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1956년 12월 14일 신문은 유도회의 분렬을 보도했다. 김창숙과 리성주(李性柱) 량인이 각각 별개의 전국대회 계획을 내었는데 리성주 쪽은 집회가 허가되어 농업은행에서 14일에 회의를 열었고, 김창숙 쪽은 명륜당(明倫堂)에서 같은날 같은 대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당국에서 허가를 하지 않아 열지 못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유도회에도 정치 바람이 불었구나하고 신문을 보던 사람은 혀를 찼다. 그러나 유도회의 분렬은 이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그해 연초로 거슬러 올라 간다. 이 거대한 유림(儒林)의 힘을 정․부통령 선거에 리용할려고 자유당은 기도하였다. 유도회 상무위원인 이우세(李佑世) 一파는 5월 선거에서 자유당을 밀어주자고 나섰다. 그러나 회장 김창숙이 이 말을 들어 줄 리가 만무했다. 유도회는 회의 이름으로 어느 정당이던 밀어 줄 수 없다는 것이 유도회 정통파의 주장이었다. 이 문제로 옥신각신 하다가 김창숙은 고향인 성주(星州)로 내려 갔다.

이 틈을 타서 리성주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세 가지 고소사건을 제기했다. 첫째는 제단리사장 리명세(李明世)가 대성전(大成殿) 수리비를 썼다는 것이고, 둘째는 문교부에 증회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성균관대학교 동창회 간부가 임시중앙평의원회에 침입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고소사건은 모두 리성주의 패소 또는 무혐의로 끝났다. 9월 30일 석전(釋典) 때에 리성주가 재단 간사인 류재우를 구타하여 부상을 입혔다. 이와같이 불상사가 속출하자 김창숙은 12월 14일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수습대책을 강구하려고 했다. 리성주 일파는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같은날 자기파의 대회를 소집했다. 대회장소인 명륜당까지는 점거할 수 없었든지 농업은행 3층 회의실에서 일방적인 대회를 개최했다. 김창숙 쪽 정통파는 집회허가가 내리지 않아 14일에는 대회를 열지 못했다. 다음날인 15일에 경찰의 감시를 받아가며 명륜당에서 대회를 열고 9명의 위원을 선정해서 <유도회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17일 하오 리성주 일파의 배후인물인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김상도(金相道)와 송경섭(宋璟燮)은 농은파의 회원을 인솔하고 유도회에 란입하여 사무실의 명도를 요구했다. 그후 이들은 계속하여 유도회 본부에 침입하여 자기들이 합법적인 간부이니 모두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 이듬해인 1957년 1월 7일, 이들은 유도회 상임위원 16명을 상대로 고소를 제기하고 13일에는 동대문 경찰서원이 10여명의 직원을 연행해 갔다. 이날 하오 7시 연행되었던 직원이 다시 돌아오자 경찰은 경호의 책임을 진다는 구실로 쌍방 3명의 대표만 남게 하고 모두 돌려 보냈다. 14일 경비하던 경관이 돌연 철수하자 농은파 10여명이 란입하여 정통파를 구타 축출했다. 특히 일제시대 왜경의 고문으로 하지를 못 쓰게 된 80세 김창숙을 구타하여 갈비뼈를 부지르는 폭행을 자행했다.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수수 방관했다. 그 후 이 사건은 정통파의 부위원장인 량일동(梁一東)에 의하여 국회에 보고까지 되었으나, 별 대책이 없었다. 사건은 법적투쟁으로 돌입했다.

이렇게 되자 농은파에서는 일방적으로 임원을 개선했다. 위원장이 리기원(李基元), 부위원장이 김상도(金相道), 중앙위원회 의장이 리성주(李性柱), 부의장이 김로동(金魯東)으로 한다고 했다. ,
그러나, 법은 아직 살아 있었다. 5월 17일 정통파는 승소(勝訴)의 판결을 받았다. 집달리에 의하여 성균관은 제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풍파는 연달아 일어났다. 법정대리인이었던 최찬익(崔燦翊)과 리범승(李範昇)은 김창숙에게 요구하여 유도회 성균관합동회의를 열게 하더니, 그 자리에서 김창숙을 축출하는 배신행위를 감행했다. 저들은 자기파 일색으로 역원을 개선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유도회 위원장이 구자혁(具滋爀), 부위원장이 리범승(李範昇), 성균관 관장이 최찬익, 부관장이 류시환(柳時煥), 오봉근(吳鳳根), 감찰위원회 위원장이 류해동(柳海東), 부위원장이 민정호(閔定鎬), 위원이 최영범(崔榮範) 외 8명.

김창숙은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2차에 걸쳐 승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찬익 일파는 자유당의 권세를 믿고 명도하지 않았다. 1960년 4월 민주혁명이 성공하자 성균관 대학교 총장 리선근(李瑄根)과 이들 자유당계의 간부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물러났다.

자유당이 망한 천하에서 그들은 이 이상 권력을 연장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쪽 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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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 판사가 재판할 때 <나를 일본법으로 재판하지 말고 국제법으로 재판하라>고 말했던 렬사가 하루빈 선 생이 처음이었고, 심산선생이 그 두 번째였다. 하루빈과 심산은 닮은 곳이 많다.

◑독립협회가 주최하여 1898년 11월에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청년부원 리승만이 연설을 했다. 핍박하는 말하기로 왕을 욕했다. 과천군수 길영수가 연단에 올라가서 리승만을 끄잡아 내렸다. 리승만이 군수 길영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이 사건에서 리승만이 어핍지존(語逼至尊) 무군지죄(無君之罪)에 걸려서 1899년 1월에 감옥에 들어갔다. 왕이 특지로 잡아가두라고 한 것이었다. 비애왕이 청년 리승만을 미워했다. 리승만 아내 박씨부인이 진정서를 들고 다녔다.

◑리승만이 비애왕을 욕하다가 종신징역을 받고 감옥살리를 5년 하던 1904년에 이등박문이 러시아를 이긴 기쁨으로 리승만을 특사대표로 석방시킨 것이었다.

◑리승만이 심산을 때려잡으려고 하는 것은 쥐새끼가 호랑이한테 달려드는 격이었다. 리승만 감옥살이가 실려있는 <고종실록>이 리승만이 죽고(1965) 난 뒤 1970년에 출판되었기에, 리승만이 자기감옥살이를 거짓말로 꾸미게 된 것이다. 리승만은 <독립정신 옥중기>라는 거짓말 책을 출판하여 천하에 거짓말을 퍼뜨렸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으랴로 된 것이다.

◑리승만에 붙어서 명예를 조금 얻어보려던 미꾸라지들이 호랑이한테 덤벼들었던 것이다.

◑심산을 해롭게 했던 미꾸라지들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길이 없다. 미꾸라지 무리가 죽고 나면 동시에 흔적이 사라진다. 바르게 살았던 사람은 그 이름이 전하여 만세토록 전하게 된다.

려증동/경상대 명예교수/배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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